세계최초의 여행자 이븐 바투타
이븐 바투타의 30년간 여행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13세기 아시아, 인도양, 이슬람에 대한 연구를 종합해보면, 14세기 전반기에 이루어진 이븐 바투타의 여행은 이슬람 - 인도양 - 동남아시아 - 중국을 연결하는 무역 체제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그 의미를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이 무역 체제는 아라비아 해 - 인도양 - 남중국 해 사이에서 형성되어 왔다.
몬순 기후는 이 무역 체제를 크게 세 가지 하위체계로 나누었는데, 각 하위체계는 하나의 순환적인 무역 항로를 갖고 있으면서도 세 가지 하위체계는 공통의 무역 항로를 통해 교역을 하였다. 각각의 하위체계는 (1) 홍해 - 아라비아 반도 - 페르시아 만에서 인도의 남서쪽 끝 (2) 인도의 남동 해안에서 말라카와 자바의 해협 (3) 말라카 - 순다 해협 - 자바 - 남중국 해 - 중국의 무역 항구로 이루어졌다.
여기서 중국의 명나라가 정화의 항해 이후 하위체계에서 벗어나기 이전의 한국 (통일신라, 고려, 조선 초)은 세 번째 하위체계에 속했던 나라임에 주목하자. 이 시기의 한국이 인도양 무역체제의 이러한 성격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더욱 심도 있는 연구가 요청된다. 이븐 바투타의 30년 여행은 이 세 가지 하위체계에 해당하는 지역들을 모두 포함하였다. 아프리카 동부의 쿨와, 마끄다슈에서 인도와 몰디브, 말레이, 자바, 필리핀 일부, 중국의 항조우에 이르기까지의 광범위한 지역이 모두 포함된 것이다.
이븐 바투타의 영향을 받은 지리학자를 한 명 소개 한다. 바로 중국의 정화와 콜럼버스를 연결해준 15세기 가장 중요한 지리학자, 이븐 마지드(Ibn Majid, 1421-1500)다. 그는 포르투갈이 인도양에 뛰어들기 이전에 항해 지침서(1490)를 발간했는데, 이 항해 지침서는 기본적으로 몬순 기후에 근거하여 작성되었다. 이븐 마지드는 이슬람의 여러 지리학자들과 이븐 바투타와 같은 여행가 및 탐험가들의 기록을 종합하여 항해 지침서를 체계화하였다. 그의 항해 지침서는 콜럼버스의 신세계 발견은 물론이거니와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다시 이븐 할둔으로 돌아오자. 그는 《역사 서설》에서 이븐 바투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븐 할둔은 "여러 왕조들이 가지는 국력의 강약과 대소에 많은 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이븐 바투타가 여행을 마치고 마그리브로 돌아왔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이븐 할둔은 “이븐 바투타가 20년 전에 동방으로 여행을 떠나 이라크, 예멘, 인도 등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라고 했는데, 이븐 할둔의 이 진술은 이븐 바투타의 전체 여행 기간이 30년이라는 점과 다르다.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에 의하면, 1325년으로부터 20년이 지난 시점은 1345년으로, 인도를 떠난 이븐 바투타가 자바에 도착했을 때이다. 왜 10년이라는 시간이 차이가 날까.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를 쓴 이븐 주자이가 기록을 잘못 했을까. 아니면, 이븐 할둔이 착각한 것일까. 현재로서는 판단할 길이 없다.
이븐 바투타가 여행을 마치고 마그리브로 돌아와 자신의 여행 체험에 대해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을 때, 사람들은 그가 거짓말을 한다고 수군거렸다. 이븐 할둔도 이 점을 지적하면서 유명한 재상인 파리스 이븐 와드라르와 만났을 때, 이븐 바투타가 주위 사람들에게 하는 말에 대해 이븐 할둔 조차도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 재상 파리스는 하나의 비유를 들면서,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부정하지 말라고 충고를 해주었다. 감옥에서 자란 어떤 재상의 아들이 감옥에서 쥐만 보았기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가 소와 양 등 다른 동물을 이야기했을 때, 그 동물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가늠할 수 없었다. 파리스는 이런 비유에 근거하여, 이븐 바투타가 다른 왕조에 대해 이야기한 것에 대해 부정하지 말라고 충고했던 것이다.
"당신이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다고 해서, 왕조들의 상황에 대한 그런 정보를 부정해버리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이븐 할둔은 이븐 바투타가 여행에서 보고 들은 것에 대해 마그레브 사람들이 반신반의하면서 설왕설래하는 것을 두고 다음과 같이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우리는 주어진 자료를 살펴보고 자신의 판단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명철한 마음과 올바르고 자연적인 상식을 가지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구분해야 할 것이다. 가능의 범주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여야 하고, 그 밖의 모든 것들은 부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가능'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지적으로 가능한 모든 것들을 지칭하는 절대적인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너무나 넓은 범위를 포괄하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실제로 가능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결정할 때에는 유용하지 못하다. 우리가 말하려는 것은 어떤 특정한 사물에 내재적으로 존재하는 가능성일 뿐이다. 우리가 어떤 사물의 기원, 종류, 차이, 크기, 강도 등을 탐구해보면, 그것과 관련하여 보고된 자료가 가능한 것인지 아니면 불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븐 할둔은 17세가 되던 1348년에 페스트의 유행으로 부모와 스승을 떠나보내면서 위기가 본격화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무서운 페스트가 나타났다. 제국들이 쇠퇴의 시기에 있던 때였다. 페스트는 제국들이 완전히 파괴되리라는 위협을 갖는 정도까지 제국들의 힘을 약화시켰다. 토지 경작은 사람의 손이 없어서 중단되었고 도시 주민들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작물을 경작했던 곳은 모두 모습이 달라졌다.
14세기 '흑사병'은 유럽에도 엄청난 타격을 가했지만, 이에 못지 않게 인도양 무역 체계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14세기 위기는 흑사병에 의해 촉발되었다. 무하마드 알 이드리시(12세기 이슬람 최고의 지리학자) 그는 1150년경에 은을 녹여서 세계 지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보르네오와 나이지리 등을 잘 알았지만, 아프리카 서부 해안 지역은 지도에 담지 못했다. 왜냐하면, 아랍인들은 당시에 "대서양이 바로 진창과 어둠의 상징이었다."라고 나쁜 소문을 퍼뜨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무역을 위해 대서양으로 진출하는 것을 차단시켰는데, 바로 이런 이유로 이드리지 자신도 이 지역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는 이븐 할둔의 지리학적 사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도 영향을 미쳤지만, 이븐 할둔은 알 이드리시가 쓴 《루지에로의 책》에 담겨 있는, 인간의 거주지 '움란'에 대한 일곱 개의 기후대로의 분류를 그대로 수용하였다. 이븐 할둔은 기후가 인간의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였다. "제1, 제2 기후대에 거주하는 흑인들은 더운 지역에 살고 있다. 열기가 그들이 기질 형성을 지배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기후 때문에 흑인들의 지능이 부족하고 지적이 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갈레노스와 달리 이런 생각은 아직 불완전하고 입증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 이븐 할둔을 14세기의 과거에만 묶어둘 수 없다. 그가 해명하려고 했던 문제는 14세기 마그레브의 '저개발'이었다. 이 문제는 현재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이븐 바투타, 에덴을 찾아 떠나다
이븐 바투타가 여행을 했던 14세기는 이슬람이 지리적으로 가장 크게 확장된 시기이다. 이슬람이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의 세 대륙(구세계에서는 세 대륙만이 알려졌다.)을 모두 아우르면서도, 14세기는 이슬람의 다중심적이고 다극화가 이루어졌던 시기이기도 하다. 동방의 일한국(1258-1353), 서방의 맘루크 왕조(1250-1517),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했던 나스르 왕조(1230-1492)를 비롯하여 지역별 중심세력이 형성되었다.
이와 같이 이슬람 세계의 변화를 목도했던 이븐 바투타는 이 세 대륙을 모두 여행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렇다고 해서, 이븐 바투타가 자신보다 앞서 이루어졌던 여행 관련 지식이 없었다면 그는 30년에 걸친 미증유[未曾有 : 아직 한번도 있어 본 일이 없음]의 여행을 감행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여행 관련 지식이 있었다고 해서 어느 누가 30년간의 여행을 결심할 수 있을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담대한 결심을 하게 했을까.
콜럼부스, 마젤란, 부겡빌, 제임스 쿡의 항해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그 나라의 왕실이 항해를 적극적을 지원했기에 재정적으로도 도와주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븐 바투타의 경우는 달랐다. 여행기 어디에도 그가 살았던 마그레브 지역의 모로코 왕조가 지원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럼에도, 이븐 바투타는 어떻게 30년에 걸쳐서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를 모두 여행할 수 있었을까.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길고 긴 여행을 가능하게 했던 현실적인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이슬람 문명의 다극화와 지역화 과정에서 이슬람의 포교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수피즘(Sufism)에서 찾을 수 있다. 소위 '자위야'라는 수피즘의 수행 도장이 이븐 바투타의 길고 긴 여행에 몸과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다. 수피즘은 '자위야'를 통하여 이슬람 세계의 거대한 포교 네트워크로 형성하였다. '자위야'는 수행과 포교 활동의 거점 장소인 동시에 이슬람 여행자들에게는 일종의 숙박지였다. 결론적으로, 수피즘에 근거한 '자위야'는 이븐 바투타의 30년간 여행을 가능하게 했던 물질적인 토대인 동시에 신앙의 근거지로 작용하였다.
이븐 바투타의 '에덴'을 찾아서 Ibn Battuta's Searching for Eden
이븐 바투타는 1344년에 몰디브 제도에서 스리랑카로 건너갔다. 항로를 아는 선장이 없어서 3일간 걸릴 여정이 9일이나 걸렸다. 스리랑카의 푸탈람(Puttalm)을 찾은 이븐 바투타는 "제가 이 섬은 온 목적은 다름이 아니라 거룩한 발자국, 즉 아담 - 그에 평화를 - 의 발자국을 탐방하려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븐 바투타는 여기에서 아담의 발자국을 따라 여행하면서 본 것을 기록하였다.
그는 섬 전역에 루비가 널려 있음을 보았다. "모든 땅은 소유주가 있어서 사람들은 땅뙈기를 구입해서는 루비를 파낸다. 루비 가격이 1백 파남(fanam) 이상이면 술탄에게 값을 치르고 팔며, 그 이하는 채굴자가 갖는다. 흰 코끼리의 이마에 일곱 개의 루비가 박혀 있는 것도 있었는데, 각각의 루비가 계란보다도 더 컸다.
이븐 바투타는 이 섬으로 출발하기 전에도 보일 정도로 높은 산에 들어서 "아담의 발자국으로 가는 두 갈래의 길" 즉, '바바' - 아담 - 의 길과 '마마' - 이브 - 의 길에 대해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이 섬에서는 아담을 바바, 이브를 마마라고 불렀다.)
마마의 길은 걷기가 쉬어서 순례자들은 산에서 내려올 때 이 길을 택하며, 바바의 길은 꼬불꼬불하여 오르기가 힘들어 순례자들은 올라갈 때 이 길을 이용하게 마련이다. 이 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열개의 쇠사슬을 잡고 계단을 오르도록 되어 있는데, 마지막 열번째 쇠사슬을 잡고 올라가서 산 정상에 올라서면 자신도 모르게 신앙고백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이 마지막 사슬을 신앙고백을 의미하는 '샤하다' 사슬이라고 부른다.
스리 파다(Sri Pada 또는 Adam's Peak)는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높은 산이다. 이븐 바투타는 바로 이 산에서 거룩한 발자국을 참배하기 위해 왔다. 그리스도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도 이 섬이 바로 에덴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거룩한 발자국, 즉 우리의 시조인 아담 - 그에게 평화를 - 의 발자국은 펑퍼짐한 곳에 두드러져 있는 거무스름한 암석에 찍혀 있다. 거룩한 발은 암석 속에 푹 빠져들어가 그 자국이 깊이 패어 있다. 발자국의 길이는 11쉬부르다. 옛날 중국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엄지발가락 부분을 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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