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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고전 음악

Beethoven_Symphony No.5



베토벤 심포니.# 5











서울 심포니 베토벤 심포니 5[운명]      


 

뉴욕중앙일보 오피니언

                                                   서울시향과 정명훈

 

                                                                                           김종수 울산교향악단 창립단장

 

<>   2.17.15

음악은 종교와 같다. 타고난 심성까지 변화 시킬 있는 것이 음악이다. 1945 2 대전이 끝나고 일본국민 모두가 실의에 빠졌을 군마(群馬) 다까사끼(高崎)시의 원로들은 지역청소년들의 장래부터 걱정했다. 클래식음악 프로그램을 들고 학교를 찾아가는 방문연주로 청소년들의 정서를 다듬었다. 지역사회를 위한 이런 역할로써 군마교향악단은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된다. 일본의 작은 내륙 현에서 3명의 총리가 나오고, 사회각계의 인물 군마 출신이 많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한국은 2013 대통령 취임식의 축하무대를 준비하면서 싸이 공연을 홍보했다. 한류와 국격(國格) 문화를 분별 못하는 이런 수준의 나라에서 그나마 서울시향을 통해 시민들의 문화인식을 보게 다행스럽다. 40% 안차던 관중석은 정명훈 감독이 취임한 2005년부터 90% 넘게 채워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BBC 프롬스 세계최대의 클래식 음악축제다. 7000명을 수용하는 로열 앨버트홀의 티켓은 시즌 전에 매진되고 세계의 음악애호가들은 BBC방송으로 현장실황을 시청한다. 그해 최고수준이 인정돼야 초청을 받는데 작년에 서울시향이 초청되어 언론으로부터 찬사의 평가 5개를 받았다.

여름 야외음악축제는 세계를 털어 대중적 인기가 가장 높은 곳이 이태리 베로나 오페라 축제. 인구 26만의 베로나는 시즌 동안 50 명의 관람객을 모으고 7.000 원의 경제효과를 낸다. 작년의 포스터 로고는 100+1 표시됐다. 100주년 다음해란 뜻이다. 2013 100주년행사기획은 특별했다. 오페라는 물론, 갈라 콘서트 프로그램을 만들어 지휘봉을 정명훈에게 맡겼다. 세계적 솔리스트와 베로나, 베네치아 오페라교향악단을 합친 장대한 연주는 세계적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연주포스터는 한국 음악사에 남을 소중한 사료(史料) 된다.

감독은 프랑스 바스티유 오페라극장 음악감독 시절 30대에, 20세기 최고의 현대음악 작곡가 메시앙(1908~1992)으로부터 마애스트로 호칭을 들었다. 난해한 그의 음악을 심오하게 풀어준 때문이다. 명반이 1990년에 녹음된 메시앙의 '투랑갈릴라 교향곡'이다.

감독의 천재성은 오케스트라 사운드를 요구하는 말러(Mahler), 현대음악 표현에서 더욱 빛나기 때문에 세계적 거장으로 인정받는다.

 

<2.18.15

이제 서울시향은 세계 유수의 음반제작사로부터 녹음의뢰가 끊이지 않는다. 조련사의 노력으로 한국교향악단의 사운드가 세계시장에서 인정받고 연주로서 저작권료를 받게 것이다. 우리국민이 SP음반으로 클래식을 즐기고 배웠던 것이 불과 50 일이다. 그런 나라의 사람들이 지금 세계 유수 오케스트라의 핵심적 연주자가 되었는가 하면 사람은 조국의 교향악단을 세계무대에 세우고 있다. 서울시향의 빠른 성장은 지휘자와 단원이 같은 모국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힘이 된다. 지휘자와 단원간의 감정일체가 쉽기 때문이다.

감독은 예술가로서 원숙기에 들어 나이이다. 그의 정열을 고국을 위해 쏟아 붓도록 배려할 없을까?

뉴욕 카네기홀은 명성 때문에 많은 한국 음악인들이 찾아온다. 지금껏 가장 인상을 남긴 무대는 2010 민이 지휘한 부산 소년의 관현악단 연주였다. 100명이 넘는 고아들로 구성된 아마추어들이 기적 같은 천상의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그날 차이콥스키 교향곡 5 2악장은 모든 청중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믿기 힘든 하모니를 만들어내는 연주자의 모습을 보고서다. 턱을 감싼 바이올린은 그들 엄마의 품이었고 그리움에 젖은 , 단원들의 애절한 표현은 2,000명이 넘는 관중의 심금을 울린 감동이었다.

무대 또한 감독의 헌신적 노력의 결실이었다. 2007년부터 자청하여 그의 아들 민과 함께 기적을 창조한 것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왕복하며 봉사한다는 것은 누구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런 마음가짐은 그의 성장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다. 미국이민생활 중에는 어린 나이지만 신문배달과 부모의 식당일을 거들며 끈기를 키웠다. 그리고 2005 서울시향을 맡아 한국생활을 시작할 때는 자기 아들을 시골 거창고등학교에 입학시키고 그곳에서 한국의 좋은 품성을 배우도록 했다.

감독은 마애스트로 위치에 서기까지 개인의 실력, 노력, 인간관계 형성으로 컸다. 오자와 세이지가 세계무대를 주름잡을 까지 일본정부와 기업의 지원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가 새로운 교향악단을 맡을 마다 일본국민들의 표현은 정복(征服)이라 했다.

메사추세츠 탱글우드 음악축제 열리는 필드에는 오자와 세이지홀 있다. 보스톤 심포니 음악감독을 맡은 세이지를 기념하여 일본 유수기업들이 공동으로 출자하여 세웠다. 그들은 기업의 이런 역할이 일본국민의 위상과 일본상품의 가치를 높인다는 것을 안다.

지금 서울시향은 감독의 연봉문제로 시끄럽다. 기업을 살릴 인재라면 연봉이 문제되랴.

영향으로 올봄에 계획된 서울시향 미국투어에서 뉴욕연주가 빠질 같아 안타깝다.

월드컵이 끝난 축구감독에 대한 한국국민의 정서는 어떠했나를 한번 비교해 일이다.

우리는 짧은 기간에 국가 산업화, 사회 민주화 이루었다. 늦었지만 이제는 국민 문화화다. 국보 같은 사람의 상처는 국민이 보호막이 돼야 나라 문화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