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철 오트르투 산행 동영상
‘평창’을 생각하며 180km 내달렸다
글 . 사진 강정국 _ 대한산악연맹 산악스키위원회 총무 승인2013.12.09 13:05 발취 :마운틴월간지
샤모니에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정국아, 샤모니에 지금 비가 내리고 있다. 에귀디미디(3890m)에는 많은 눈이 내리고 있을 거야! 준비 잘해라!” 반가운 사람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들려온다. 나는 3월 중순 이탈리아 마르텔로에서 개최된 스키등반월드컵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종일이와 고소적응훈련을 하기 위해 샤모니에 여장을 풀었다. 그곳에서 처음 인사를 나눈 조성주 선배와 형수. 구수하면서 맛깔스런 전라도 사투리에 거칠 것 없는 언변, 연일 계속되는 만찬으로 배고픔과 마음에 한껏 포만감을 주셨던 분, 더구나 이탈리아에서 대회를 마치고 13시간을 운전하여 새벽 2시 샤모니에 도착하였는데, 그 시간 대문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며 “라면 먹고 싶지!, 한 그릇 먹고 가라!”며 뚝배기에 푸짐하게 라면을 끓여 주어 감동과 함께 배불리 먹었던 기억이 채 가시지도 않은 4월12일 10:30분, 나는 다시 제네바에 도착한다.
차창 밖으로 비가 내린다. 저 멀리 보이는 몽블랑 산군은 구름을 뒤집어 쓴 채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달리는 버스의 와이퍼는 삐거덕 거리는 불편한 소음을 그칠 줄 모른다. 그렇게 1시간여를 달려 조문행씨가 운영하는 알펜로제에 도착한다.
대한산악연맹은 2012년 산악스키위원회의 사업으로 프랑스 샤모니에서 스위스 체르마트까지 오트루트 스키등반(haute-route ski mountauneering)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대원은 울산광역시산악연맹의 한영준(산울림산악회), 서경만(울산맥산악회), 전가수(울산과학대OB), 김권종(현대자동차산악회), 제주도산악연맹의 유광개, 경기도산악연맹의 강정국(철수와영이 산악회) 6명으로 구성하였고 4월 11일부터 4월 25일까지 15일간의 일정으로 계획하였으며, 알피니즘의 본고장인 알프스 지역의 스키등반과 스키등반의 활성화 및 스키등반을 통한 알피니즘의 실현을 등반목적으로 하였다.
우리는 대한산악연맹 샤모니연락사무소인 알펜로제에 여장을 풀고, 바로 샤모니 시내에 있는 가이드사무실을 방문하여 보험가입 및 등반장비, 등반루트, 날씨 등에 관한 정보를 얻고 숙소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는 것으로 하루를 정리한다.
다음날 4월 13일 오트루트 출발에 앞서 에귀디미디 오프 피스테(off piste·자연설)에서 다운힐 연습을 위해 이동한다. 이른 아침 날씨가 좋지 않지만 에귀디미디 로프웨이 앞에는 많은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고, 우리는 에귀디미디까지 1인당 53유로를 지불하고 로프웨이에 오른다. 에귀디미디까지 올라가는 로프웨이는 중간에 한 번 갈아탔음에도 채 20분이 걸리지 않아 정상에 도착한다. 며칠 동안 내린 눈이 에귀디미디에서 스키다운힐을 할 수 있는 지점까지 내려오는 길이 러셀이 되지 않아 발디딤이 조심스럽다. 에귀디미디에서 메르 데 글라스 빙하를 타고 내려오는 루트를 발레 블랑쉬(vallee blanche)라고 하는데, 번역하면 발레는 ‘계곡’이고, 블랑쉬는 ‘희다’라는 뜻으로 세계에서 가장 긴 오프 피스테 구간으로 18km이상을 스키로 다운힐 할 수 있다. 우리는 발레 블랑쉬의 루트 중에서 클래식 루트를 선택하였지만 화이트아웃으로 앞을 분간할 수 없어 스키 다운힐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저 주변에 널려 있는 크레바스에 신경이 곤두서서 조심스럽게 메르 데 글라스 빙하까지 다운힐을 할 수 있었다. 메르 데 글라스 빙하는 약10km의 길이에 평균 15도의 경사로 이루어져 있는데, 우리는 그 위에 새겨진 스키 트레일에 의지한 채 몽탕베르 산악열차를 탈 수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쉽지만 그랑드조라스 와 드류도 볼 수 없었다.
샤모니에 연일 계속되는 비로 인하여 더 이상 연습을 진행할 수 없었다. 더구나 에귀디 미디와 브레방 등 주변 산에서는 밤마다 인위적으로 눈사태를 일으키기 위해 “뻥뻥”하면서 다이너마이트를 계속 터뜨린다.
4월 15일 새벽부터 눈이 내린다. 아침에 신선한 빵을 사기 위해 숙소를 나서는데 다시 비로 바뀐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숙소에서 바라보는 눈의 경계선 이 보송빙하 하단의 전나무 숲까지 내려오다가 오후가 되면 구름 속에 해가 모습을 잠시 드러내면서, 그 경계선은 보송빙하로 다시 물러난다. 오늘은 그랑몽테 스키장에서 다운힐 연습을 하기로 한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오트루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오전만 연습하기로 하는데, 1일 4시간권(28유로)을 구매하는 경우에는 그랑몽테까지 올라갈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중간에 내려서 리프트를 갈아타고 최대한 올라갈 수 있는 곳까지 올라간다. 그랑몽테 스키장은 정돈된 스키장 주변으로 파우더 스키를 즐길 수 있는 오프 피스테와 연결되어 있어, 이곳에서 연습을 하는 것도 충분하다. 단지 고도감과 크레바스가 없기 때문에 좀 더 안전하게 연습을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곳 사람들의 스킹 실력은 상체보다는 하체에 좀 더 비중을 두면서 스키를 타기 때문에 눈의 상태와 상관없이 스킹을 즐길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국내 스키장에서 즐기는 스키어들의 경우 상체에 좀 더 비중을 두면서 스키를 타고, 더구나 자연 상태에서의 눈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눈의 상태에 따라 많은 실력차를 보인다. 우리는 몇 번이나 계속하여 리프트를 타고 오르내리면서 모든 연습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내일부터 시작될 오트루트를 위해 마지막 장비점검과 배낭을 꾸린다.
4월16일, 그랑몽테(GrandsMontets)-아르장티에르(Argentiere, 2500m)-트리엥산장(Cabane de Trient, 3170m) 표고차(±1948m)
드디어 오트루트를 시작하는 첫 날이 밝았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날씨는 좋지 않고 숙소에서 바라보이던 에귀 디 미디정상이 보이지 않는다. 알펜로제에서 가이드 미셀과 8시에 만나서 오트루트 출발지점인 그랑몽테 케이블카(Grands Montets cable car)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그랑몽테 정상역까지 이동하는데 날씨가 좋지 않다. 바람을 타고 오르는 케이블카는 마치 바다 위 너울을 타고 넘듯 출렁거린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고도의 상승으로 약간의 울렁거림이 있었지만 이내 진정된다. 그랑몽테 정상역 부근에는 아르장티에르 빙하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서 있기 조차 힘들다. 미셀은 바람을 피하기 위하여 서둘러 아르장티에르 빙하까지 스키다운힐을 해야 한다며 재촉한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유광개 선배가 계속해서 넘어지면서 시간이 지체된다. 미셀은 서둘러야 한다며 ‘Hurry up’이라고 외쳐보지만, 넘어지는 유광개 선배를 바라보는 대원들의 표정에는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결국 미셀은 유광개 선배가 오트루트를 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고, 우리와는 반대로 다운힐을 하여 홀로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어느 정도 내려왔을까? 바람은 잦아들었지만 화이트 아웃으로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다. 아르장티에르 빙하로 내려서는 길은 보이지 않고, 아무리 소리쳐 불러 보아도 뒤에 내려오는 대원들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느 곳에 크레바스가 숨어 있는지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스키배낭의 가슴벨트에는 호루라기가 달려 있기 때문에 위급한 상황에서 호루라기를 이용하여 구조 및 신호를 보낼 수 있도록 되어 있지만, 이 기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모든 대원들이 긴장한 탓인지 크레바스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빨리 빙하를 건너가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하여 서둘러 빙하를 빠져나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콜 두 파숑(3208m)까지 스키 업힐이다. 하지만 정상적인 루트가 눈사태 위험지역이라 우회 루트를 선택하여 스키 업힐을 시작한다. 스키등반은 경사도에 따라 장비 사용을 달리하는데 기본적인 스키 업힐은 스키 바닥에 붙이는 스킨(skin)으로 충분하고, 좀 더 가파른 경사에는 스키 전용 크램폰을 부착하여 스키 업힐을 한다. 그리고 설벽으로 50도 이상의 경사에는 스키를 배낭에 부착하고 부츠 크램폰을 착용하고 등반을 한다. 산악스키어로서 경험이 풍부할수록 최대 경사도까지 스키만으로 업힐 할 수 있는 능력의 차이를 보인다. 스키등반도 암벽등반과 동일한데, 암벽에 매달릴 때 최대한 암벽과 거리를 두어야 발에 하중이 실리면서 밀리지 않는다. 스키 등반의 경우에도 체중을 스키에 실어 스키의 베이스에 전달되도록 해야 스키가 뒤로 밀리지 않는다. 암벽등반가의 경우에도 스키등반시 이 원리를 응용하지 못하여 설면에 몸을 밀착시켜 스키등반을 하기 때문에 스키가 뒤로 밀리면서 제대로 된 스키등반을 즐기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또한 등반할 때 ‘배낭 여닫는데 주저하지 마라!’는 스키등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스키등반은 산에 오르기도 하지만 스키로 다운힐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오트루트의 경우에는 하루에도 몇 차례 업힐과 다운힐을 해야 하기 때문에 스킨을 붙였다 떼었다 수차례를 반복해야 한다. 그리고 크램폰을 착용하고 피켈을 이용하여 등반도 하면서 배낭에 들어 있는 행동식도 섭취해야 한다. 여간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 아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모두 충족될 때 오트루트의 스키등반이 가능하다.
아르장티에르 빙하를 건너 콜 두 투르까지 스키등반하는데 이 지역은 쿨르와르 지형이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통과해야 한다. 설면의 경사도가 어느 정도 있는 지형에서 중간에 스키를 벗어 배낭에 메고 크램폰을 착용하는 일은 쉽지 않다. 마치 암벽등반 도중에 매듭을 통과해야 하는 어려움과 같은데 평소에 설면에서 스키를 착용하거나 벗는 연습이 충분히 이루어져야 가능하다.
콜 두 파숑까지 스키등반을 하고 르 투르(Le tour)까지 스키 다운힐을 시작한다. 오르는데 2시간이 소요되었지만 스키 다운힐은 채 10분도 걸리지 않는다. 저 멀리 트리엥 산장이 보인다. 하지만 산장이 위치한 곳은 바위 위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다시 업힐을 해야 한다. 산장이 보이는 안도감에 긴장감이 풀어져 쉽게 나아가지 못한다. 더구나 마지막 구간에 다시 업힐을 해야 하는 고단함에 몸과 마음은 지쳐 간다.
17시가 다 되어 트리엥 산장에 도착한다. 산장의 분위기는 국내 대피소와 많은 차이를 보인다. 누구나 올 수 없고, 준비된 산악인이 아니면 접근조차 어려운 곳이다. 그래서인지 저녁 메뉴 또한 코스 요리로 야채와 고기, 후식까지 여유롭게 산장에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4월17일, 트리엥산장(Cabane de Trient,3170m) - 프라폴리 산장(the cabane de Prafleuri,2662m). 표고차(±3100m)
트리엥산장에서 출발은 처음부터 다운힐이고 경사도는 그리 높지 않다. 다운힐하여 30분 정도 내려오면 에캉데스(Ecandies 2796m) 고개까지 스키 업힐을 해야 한다. 이곳은 처음에 스킨을 붙여서 업힐을 시작하고, 중간에 스키 크램폰을 착용하며, 마지막 구간에는 스키를 배낭에 착용하고 등반을 해야 한다. 이 구간을 통과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1시간 남짓.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다운힐, 트리런(Tree run)을 할 수 있는 구간이 눈에 들어온다. 전나무 숲 사이로 아무도 없는 설원을 우리들만의 슬라럼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오프피스테의 구간을 다운힐 하고, 뒤 돌아서서 내려온 설원위에 S자가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그림을 보는 즐거움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즐거움이다. 전나무숲을 빠져 나오면 마을이 보이는데 겨울철 마을의 인적은 찾아볼 수 없고, 마을의 집들을 이어주는 도로를 따라 다운힐하여 샹페(Champex,1490m) 리조트에 도착한다. 우리가 선택한 구간은 이곳에서 택시를 타고 베르비에(Verbier) 리조트까지 이동을 해야 한다. 베르비에 리조트의 스키장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처음 리프트를 타고 이동하는데 몇 개의 마을을 지나고 몽포트(Mont Font 2764m)를 지나 리프트에서 내린 곳에서 바라본 스키장의 광활한 설원은 말 그대로 스키장이 산너머 산이다. 잠시 이곳에서 스키장 슬로프를 따라 다운힐을 하면서 만난 스위스 사람들은 동양에서 온 우리들을 신기한 듯 바라보면서 격려도 한다. 우리들은 짧은 영어로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에 대해 간단한 소개를 하는데, 역시 동계스포츠 강국답게 평창에 대한 지명을 알고 있다고 대답한다.
스키등반은 다운힐과 업힐의 연속이다. 다시 스킨을 착용하고 업힐을 시작한다. 이곳의 날씨는 샤모니와는 다르게 맑고 간만에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내리쬐는 강한 햇빛이 눈에 반사되어 내뿜는 복사열이 얇은 이너웨어만으로 업힐을 가능하게 하였고 로자블랑쉬(Rosablanche 3336m)까지 업힐을 마무리한다. 이 스키장은 스키등반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훈련장으로 많은 선수들이 경량의 스키장비를 착용하고 연습을 하는데, 국내에서 대회를 준비하는 관계자의 한 사람으로서 부러움을 감출 수가 없다. 로자블랑쉬에서 다운힐을 하면 바로 프라폴리 산장(the cabane de Prafleuri, 2662m)마당까지 도착할 수 있는데,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산악스키어의 장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4월18일 프라폴리산장(the cabane de Prafleuri 2662m)-딕스산장(the cabane de Dix 2390m) 표고차(±1100m)
오트루트 구간은 보통 6시에 기상하여 6시30분에 빵과 커피로 식사를 대신하고 모든 준비를 마치고 7시에 출발을 한다. 스키등반이 많은 체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더구나 눈사태 위험 구간은 해가 들어올 때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고산등반처럼 이른 새벽에 출발해야 한다. 3일차 구간은 운행시간이 5~6시간정도 소요된다. 늦게 출발하면 눈사태의 위험과 더위로 고생한다. 프라폴리산장에서 콜 데 룩스(2804m)까지 스키 업힐을 한다. 보통 약 1시간 정도 소요되고 딕스(Lac des Dix) 호수를 왼쪽에 두고 5시간 정도 업힐을 해야 한다. 짧은 구간이지만 눈사태 위험이 있기 때문에 빠른 시간에 통과해야 한다. 설사면을 Z로 그리면서 퀵턴으로 올라야 한다. 내린지 얼마 안 된 파우더 눈의 경우에는 스키등반시에도 스키가 눈에 잠기기 때문에 많은 힘이 들지만 위험하지는 않다. 하지만 눈이 크러스트 되어 있어 스킨만으로 업힐이 어려운 경우 더구나 스키 크램폰을 착용하였을 때 설면에 크램폰의 한쪽면만 고정되기 때문에 자칫 균형을 잃어버리는 경우에는 추락하기 때문에 많은 주의를 요하는 구간이다.
에캉데스 고개위에서 다운힐을 준비하고 있는 대원들. 뒤로 보이는 구름속으로 다운힐
4월19일 딕스산장(the cabane de Dix 2390m)-비네트산장 (the cabane des Vignettes 3160m) 표고차(±1550m)
딕스산장에서 비네트 산장으로 가는 루트 중에서 몇 개의 변형루트가 있다. 산장에서 출발할 때 눈사태 위험이 매우 높거나 날씨가 좋지 않은 경우에는 루트를 우회하여 스키등반을 하는데, 출발시간이 다 되어도 바람이 잦아들지 않는다. 더구나 그동안 내린 눈으로 눈사태위험이 있기 때문에 코스를 약간 변형한다. 이 구간에는 아롤라(Arolla 3796m)까지 스키등반을 하고 비네트산장까지 다운힐 하는 코스가 있고, 코스를 왼쪽으로 우회하여 첼른빙하(Gl de Cheilon)를 건너서 파스 데 치브레스(Pas de chevres 2855m) 고개를 넘어가는 코스가 있다. 우리는 아롤라봉 대신에 파스 데 치브레 고개를 넘어가기로 하였다. 이 고개는 암벽구간으로 레더(사다리)가 설치되어 있지만 오랜 침식과 낡은 사다리로 대원들 상호간의 안자일렌을 하고, 레더에 확보를 하면서 올라가야 한다. 치브레스 고개까지 약 2시간 정도 소요되고 이곳에서 다시 다운힐을 하면 피스빙하(Gl de Piece)를 지루하게 올라가야 한다. 멀리서 보면 경사도가 상당히 있어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설수록 경사는 점점 없어지면서 내가 플라토를 걸어가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어느 정도 올라왔을까? 하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가파른 경사에 압도되어 스키가 눈 사면에 달라붙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산장이 보이지는 않는다. 구름에 가려진 산장이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어느 순간 새 울음소리가 들리고 새들이 내 주변으로 날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산장도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구나 하는 안도감이 든다.
비네트 산장에 먼저 도착한 산악스키어들은 지루하게 올라온 피스빙하를 다시 스키 다운힐 하는 여유를 보이기도 하면서 오프 피스테의 즐거움에 흠뻑 빠져들기도 한다. 우리도 오트루트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는지 잠시 여유를 부려보지만 올라온 길을 내려가기란 쉽지 않아 이내 포기한다. 이런 생각조차 대원들 모두 오트루트의 고단함보다는 매일같이 스키등반을 계속할 수 있는 즐거움에 서로의 고단함을 씻어낸다.
4월20일 비네트산장 (the cabane des Vignettes 3160m)-베르톨산장( the cabane Bertol . 3311m) 표고차(±1800m)
비네트산장에서 베르톨산장까지 직선거리는 얼마 되지 않는다. 우리는 콜른빙하를 왼쪽에 두고 크레바스의 위험이 적은 가장자리 사면을 따라 사이드슬리핑으로 다운힐을 한다. 오트루트 구간의 30%는 사이드 슬리핑으로 다운힐을 해야 하는데, 더구나 중간중간에 바위가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사이드슬리핑으로 눈사면을 내려갈 때는 제동을 하는 것도 쉽지 않다. 하지만 국내에서 스키를 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이드슬리핑의 중요성을 간과한다. 대한스키지도자연맹에서는 LEVEL1 시험과목에 사이드 슬리핑이 포함되어 있지만 자세 위주의 검정이다 보니 실전에서는 제대로 활용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가파른 눈사면을 사이드슬리핑으로 5km이상을 내려가야 할 때 더구나 제동으로 속도를 조절해야 하는 구간, 앞서가는 사람과 충돌하지 않기 위하여 스키를 피버팅 해야 하는 구간등, 실전에서 사이드슬리핑은 단순히 검정과목 이상의 효율성을 발휘하기 때문에 오트루트 스키등반을 위해서는 반드시 실전훈련을 연습해야 한다.
사이드 슬리핑으로 내려서면 완만한 경사가 나오는데 스킨을 부착하지 않고 썰매를 타듯이 스틱을 저으면서 구간을 지나간다. 가이드 미셀은 우리들이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고 판단한 것일까? 콜 데 에베크(Col de Eveque 3382m)구간을 스킨만 부착하고 업힐을 한다. 미셀 바로 뒤에 있던 나도 스킨만 부착하고 오르는데 경사가 심할수록 스키가 뒤로 밀리기 시작한다. 스키 업힐시 스키가 뒤로 밀릴 때의 느낌은 마치 암벽 등반시 바위에서 미끄러질 때의 감정과 같다. 순간 식은땀이 나면서 다리의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은 설면의 경사도가 가파르기 전에 보다 안전한 장비를 착용하고 스키업힐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콜 데 에베크의 고개에 올라서면 2540m까지 아롤라 빙하를 따라 다운힐을 하는데, 역시나 크레바스의 위험이 적은 사면에 최대한 붙어서 다운힐을 해야 한다. 그리고 베르톨산장까지 3시간 업힐을 하는데, 스위스군부대가 산악스키훈련을 하는지 헬기는 계속해서 오르내리기를 반복하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스키등반대회에 참가하는 선수들이 가벼운 복장으로 하나 둘씩 우리를 앞지르기 시작한다. 베르톨 산장이 왜 암벽 위에 설치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베르톨 산장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암벽에 설치된 래더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더구나 3층 구조로 되어 있어 숙소는 다이닝 룸 지하로 내려가야 한다.
4월21일 베르톨산장(the cabane Bertol 3311m)-체르마트(Zermatt) 표고차(±1600m)
우리는 베르톨산장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출발을 서두른다. 테테 블랑쉬(Tete blanche 3710m)에 가장 먼저 올라서서 마터호른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구하나 지나간 적 없는 광활한 플라토 위에 내가 지나는 곳이 곧 길이 되고 누군가 그 위에 자신의 흔적을 남길 수 있다는 생각에 한발 한발 조심히 스키를 옮겨 싣는다. 그렇게 2시간30분을 움직이며 테테블랑쉬 정상에 선다. 표지석 옆에 누군가 세워 놓았을 십자가 너머에 언젠가는 꼭 한번 오르고 싶고, 아니 보고 싶었던 마터호른이 홀로 장엄한 모습을 나타낸다. 1865년 이탈리아의 유명한 산악인 에드워드윔퍼가 마터호른(Matterhorn 4478m)을 초등하면서 머메리즘의 등로주의가 출현하였지만, 지금의 내가 마터호른을 오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이 다시 마터호른을 찾을 수 밖이 없는 동기를 부여해준다.
테테블랑쉬에서 잠시 여유를 갖고 다운힐을 시작한다. 이곳에서 체르마트 시내까지 계속되는 다운힐 구간이 3시간 정도 되는데, 허벅지가 터질 듯 통증이 있지만 내려간다는 즐거움에 통증조차 잊어버린다. 저 멀리 마터호른을 바라보면서 다운힐을 하고 마을을 이어주는 도로가 스키장 슬로프가 되어 우리들은 쉼 없이 내려간다. 스키의 기본태생이 마을을 이어주는 교통수단이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집과 상점들마다 스키 거치대가 설치되어 있고, 산 위에 사는 주민이 스키를 타고 내려오면서 상점에 들러 음식을 구입하고 다시 리프트를 타고 집까지 가는 모습에 국내에서 꿈꿀 수 없는 상상에 불과하겠지만, 이제 막 스키등반을 시작하는 등반가들에게 스키는 알피니즘을 실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과제이며, 내 자신이 숙제를 해결하였다는 즐거움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체르마트 시내에서 스키부츠를 신고 스키를 배낭에 메고 걸어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이 곳 주민들에게는 낯설지 않아 보인다. 그만큼 이들에게 스키는 일상화되어 있다. 샤모니와 체르마트 시내의 부인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약속이나 한 듯 스키장 슬로프에 모여 스키를 즐기는 모습, 그리고 오후가 되면 스키를 한 쪽 어깨에 둘러메고 시장에서 장을 보고 구입한 비닐봉지를 한 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자주 볼 수있다. 1년의 대부분을 스키를 즐길 수 있고, 여름과 가을에는 트레킹과 등반을 할 수 있으면서 겨울과 봄에는 스킹을 즐길 수 있는 알프스지역에서 느낀 나의 문화적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알프스를 다시 한번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5박6일 일정의 오트루트를 마감하고 체르마트에서 택시를 타고 샤모니로 돌아온다. 샤모니가 우리들의 고향이 아니지만 돌아오는 도로 위 이정표에 적힌 ‘샤모니’는 너무도 그리운 고향을 찾아가는 것 같아 지친 대원들의 마음을 달래주면서, 힘들고 고단했던 일정은 어느 새 사라지고, 벌써부터 내년도 스키등반대상지를 어느 곳으로 선택할지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누는 대화 속에 우리들의 표정은 환하게 빛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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