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비서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인공지능 성능? 중요는 하겠지만,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데에 있어서 그다지 핵심적인 건 아니다. 가령 인공지능 비서가 세탁기를 작동한다고 해보자. 적절하게 빨래를 도와주긴 할 것이다. 그러나 로봇 팔이라도 있지 않다면 결국 빨래를 넣고, 꺼내고, 세제를 넣고, 무엇을 세탁할 것인지 설정하는 것은 모두 인간의 몫이다. 인간의 행동을 모두 해결할 수 없다는 건 성능만으로 일상생활을 화려하게 바꾸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그렇다고 인공지능 비서가 쓸모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2014년, 아마존이 '에코(Echo)'를 출시했을 때의 충격은 잊을 수 없다. 경쟁 업체들이 거실을 가지기 위해서 천문학적인 마케팅 비용을 쏟아붓고 있을 때, 아마존은 거대한 발표회나 공격적인
광고도 없이 거실뿐만 아니라 5년 안에 변할 컴퓨팅의 미래를 에코로 제시했다.
필자는 당시 에코가 공간을 품은 기기라고 정의했다. '알렉사(Alexa)'라는 이름의 인공지능 비서는 애플의 시리나 구글의 구글 나우와 큰 차이가 없었지만, 주변 시선 탓에 거리에서 스마트폰으로 음성명령을 내리기 어렵다는 지적을 피해서 스피커 형태의 하드웨어로 거실이라는 공간을 공략했기 때문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스마트폰과 달리 누구나 알렉사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과 손에 쥐고 입을 마이크에 가져가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인간과 컴퓨터의 새로운 상호작용, 최적화한 인터페이스가 무엇인지 증명하는 컴퓨터 과학 측면에서도 놀라운 것이었다. 그것은 10년 전 터치스크린 인터페이스를 혁신한 아이폰이 공개되었을 때의 충격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에코는 커넥티드 시장을 바꿔놓을 실마리가 되었다. 에코 이전의 사물인터넷 전략을 보자. 사물인터넷이라는 거창한 표현이나 장밋빛 전망을 대중들은 표면적으로만 느낄 수 있었다. 그저 스마트폰으로 연결할 수 있는 제품의 등장과 앱으로 조명을 켜고, 끄는 정도의 리모컨 역할을 사물인터넷이라는 미래의 일상으로 보긴 어려웠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대부분 사물인터넷 전략이 스마트폰을 벗어나지 못했던 건 중심이 될 허브 전략이 플랫폼으로 확장하지 못했고, 기존에 잘 형성된 스마트폰 플랫폼을 이용하는 쪽이 사업에서 더 수월한 탓이었다.
그러나 에코는 달랐다. 에코는 사물인터넷 허브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터페이스를 내세워 인공지능 플랫폼을 형성했다. 스마트폰 따윈 필요도 없이 음성이 닿는 거리라면 모든 명령을 양손을 쓰지 않고 실행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인공지능 비서의 핵심으로 떠오른 건 편재성(Ubiquity)이었다. 단어만 보면 '어느 시절의 유비쿼터스냐?' 싶겠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편재론이란 '우주의 모든 사물에는 하나님의 힘이 두루 퍼져 있다.'라는 설이다. 필자가 기독교인인 건 아니다. 단지 해당 문구를 이렇게 바꿔보라.
'우주의 모든 사물에 알렉사의 힘이 두루 퍼져 있다.'
지난해, 포드는 아마존과 제휴하여 자동차에 알렉사를 탑재할 계획을 발표했다. 그리고 3월에는 구글 산하 커넥티드 업체인 네스트(Nest)가 자사 제품을 알렉사로 조작할 수 있게 했다. 거실에서 날씨나 알려주고, 책이나 읽어내렸던 에코의 편재성은 조금씩 강화된 것이다. 그렇게 2017년이다.
미국의 가전업체 월풀(Whirlpool)은 알렉사와 연결되는 21개의 가전제품을 올해 연말에 공개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예를 들어, 냉장고는 명령에 따라서 온도를 조절하고, 세탁기와 건조기는 남은 시간을 알려주거나 필요할 때 즉시 콰이어트 모드를 실행할 수 있다. 오븐은 음성으로 조리 시간과 온도를 조절하고, 남은 시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기존 음성으로 조작하는 방식이나 사물인터넷 조작과 다른 게 무엇인가?'
다르다. 다시 한번 명백하게 정의하고 넘어가야 할 건 알렉사는 인공지능 플랫폼이자 새로운 컴퓨팅 인터페이스이다. 사용자는 '알렉사 스킬(Alexa Skills)'을 통해서 스마트폰 앱을 설치하는 것처럼 알렉사에 내릴 명령을 추가할 수 있다. 그리고 에코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킬 중 하나는 '요리'이다.
아마존은 에코를 거실이나 부엌에 놓고 사용하는 걸 권장하고 있으며, 식료품과 요리 기구 판매를 촉진하는 목적으로 '아마존 키친(Amazon Kitchen)' 카테고리에 요리 레시피를 추가하고 있다. 이 레시피들은 당연하게 에코를 통해 안내받을 수 있고, 에코를 부엌에서 사용하길 권장하는 이유이다. 즉, 오븐이 알렉사와 연결되고, 아마존 키친 혹은 추가한 스킬의 레시피와 연동할 수 있다면, 굳이 음성으로 명령하지 않더라도 조리 순서와 시간에 맞춰 자동으로 온도를 조절하는 것은 코앞의 일일 것이다.
좀 더 진취적인 얘기도 해보자. 아마존은 2015년에 세제, 생수, 커피, 화장지 등 소모품의 주문, 결제, 배송을 버튼 한 번 누르는 것으로 해결하는 '대시버튼(Dash Button)'을 출시했다. 대시버튼은 센서 기기이고, 아마존은 여러 업체와 제휴하여 가전에 빌트인(Built-in)하는 계획도 발표했는데, 월풀도 협력 업체 중 하나이다. 가령 한 번에 사용하는 양을 체크하거나 또는 대시 버튼을 누르는 주기에 따라서 알렉사가 세제를 주문할 것을 추천한다고 해보자. 아마존은 쉽게 세제 판매를 촉진할 수 있다.
물론 세제를 몇 개 더 판매하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다. 되레 '알렉사로 주문하는 일이 늘면 대시버튼을 빌트인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시버튼이라는 하드웨어는 일종의 명목이고, 아마존은 소모품 업체와 계약하여 대시버튼으로 판매한 상품 가격의 15%를 수수료로 책정하고 있다. 대시버튼이 소모품 업체에 강력한 제어력을 가지는 이유는 1개 버튼에 1개 상품만 입력할 수 있고, 변경하지 않는 한 해당 제품만 주문된다는 점이다. 덕분에 대시버튼으로 많은 상품이 팔리지 않더라도 소모품 회사들은 아마존과 계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이 경쟁에서 빠진다면 대시버튼 소비자는 경쟁사 제품만을 버튼으로 구매할 테니 말이다.
시장조사업체 슬라이스 인텔리전스의 조사에 따르면 대시버튼 사용자들은 평균 2개월에 1회 정도 대시버튼을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작 1년에 6번 정도이다. 대시버튼을 누르기 전 마트에 들렀을 때 구매하거나 온라인에서 다른 제품과 함께 주문하는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시버튼을 빌트인한 가전에서 알렉사를 통해 구매를 유도한다면 어떨까? 아마존은 이전보다 더 많은 수수료를 거둘 수 있고, 대시버튼에 참여하려는 소모품 업체도 늘릴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인공지능 얘길 하다가 갑자기 소모품 얘기로 빠지느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가령 P&G는 아마존과 협력 관계이고, 세제 브랜드인 '타이드(Tide)'는 대시버튼과 제휴하고 있다. 그리고 타이드는 이런 협력 관계를 강화하는 방법으로 '타이드 - 얼룩 제거제'라는 알렉사 스킬을 제공한다. 이 스킬은 200가지 얼룩을 제거하는 방법을 소개한 것으로 알렉사에게 '커피 얼룩을 제거하는 방법을 알려줘.'라고 명령하면 타이드 세제를 활용한 얼룩 제거 방법을 설명해준다.
이는 스마트폰 앱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순전히 P&G가 아마존과의 제휴, 그리고 대시버튼을 통한 세제 판매 시너지를 위해서 개발한 것이다. 알렉사의 편재성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고로 알렉사의 편재성이 강화했을 때 아마존의 전자상거래 전략도 공고해진다. 달리 말하면 전자상거래 전략이 알렉사의 편재성을 끌어내고 있다.
많은 매체가 '올해는 인공지능 스피커의 해가 될 것'이라고 점치고 있다. 스피커 제품이 대거 등장할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스피커 경쟁이 되겠느냐?'라면, 이 경쟁은 이미 인공지능 플랫폼으로 넘어간 지 오래다.
지난해에 구글은 '구글 홈(Google Home)'이라는 에코와 경쟁할 스피커를 출시했다. 그러면서 함께 공개한 것이 인공지능 비서인 '구글 어시스턴트(Google Assistant)'였는데, 구글 어시스턴트는 구글 나우와 달리 독립적인 서비스나 기능보다는 플랫폼의 하나로 소개되었다. 구글 홈과 구글 어시스턴트를 발표한 I/O 2016은 구글 어시스턴트가 구글의 미래를 책임질 플랫폼임을 강조하는 자리였으며, 구글의 주력 플랫폼 사업인 안드로이드는 뒷전인 행사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 아마존은 이미 알렉사의 API를 공개하여 에코와 파생 기기에서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을 확보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충분히 형성된 안드로이드 생태계보다 다음 전장이 될 인공지능 생태계가 더 중요하고, 에코와 알렉사로 앞서나간 아마존에 견주려면 구글 어시스턴트가 구글의 미래이자 플랫폼이라는 걸 개발자들에게 각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시점에 월풀의 알렉사 통합 발표는 편재성에서 아마존이 구글을 한참 앞서고 있다는 걸 증명했고, 생태계의 유기적인 연결도 보여줬다. 명령어만 추가한 게 아니라 가전 업체들이 플랫폼에 참여할 이유와 전자상거래 전략으로 소모품 업체처럼 인공지능 경쟁과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곳까지 끌어들일 여지를 만들었다. 당연히 개발자들도 플랫폼의 잠재력이 더 큰 쪽에 무게를 둘 것이다.
아마존의 전략이나 알렉사가 절대적이라는 건 아니다. 단지 스피커만으로 무언가 해보려고 해서는 올해의 경쟁에 제대로 끼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편재성이 더욱 중요해진 시장에서 스피커만 덜렁 내놓는 건 서드파티 앱 없이 스마트폰 플랫폼 시장에 뛰어드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알렉사와 통합한 제품은 올해 계속 등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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