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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임진왜란] 1592년 임진왜란의 배경


임진왜란과 그 배경


본 노트는 임진왜란을 알기전에 무엇이 끊임없이 이러한 왜적의 침입을 한반도로 불러 왔는지 그 배경을 공부코져 하는데 목적이 있다. --KAP OH-- 050515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년(임진년, 선조 25) 일본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되어 1598년(선조 31)까지 이어진 전쟁이다. 임진왜란은 동북아시아 3국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제1차 침략을 임진왜란, 1597년의 제2차 침략을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구별하여 부른다.



몽골 원나라 중국을 침공 


14세기 후반 중국땅에는 중국역사의 큰 상처인 원나라 즉 몽골의 침략을 받는다.
이를 가르켜 학계에서는 원명교체기(원나라/몽골족과 명나라의 교체기)라고 부른다.

결과적으로 몽골은 1271년부터 1368년까지 중국 대륙을 지배했다.  
허지만 남성(남쪽성)의 중국사람들의 끈질긴 저항 끝에 결국 
침약후 1279년 가서야 저항이 마무리된다. 이때 부터 몽골 사람들은 남서의 한족들을 "남인" 이라고 불렀다. 

이때를 시작으로 원나라 몽골족들은 중국땅의 인구를 4개의 인종으로 구분하여 부른다.
즉 몽골인,색목인, 화복인(한인), 남송인(남인), 이 그것이다.

 
색목인 <色目人>
중국 원나라 때 몽골인을 제외한 서방계 비중국인의 총칭.

원은 몽골족 이외에 다양한 민족이 섞여 있는 다민족 국가이다. 또한 최고의 신분인 몽골인을 제1계층으로 우대하고, 색목인, 한인, 남인의 순서로 차별을 둔 신분제 사회였다. 원의 조정은 한인과 남인의 사회적 진출을 막고자 네 개의 종족 사회에 대한 차별을 법제화했으며, 의복, 집기, 수레, 안장의 사용에까지 차별을 두었다. 

색목인은 '다양한 색의 눈을 지닌 사람'을 뜻하는 제색목인(諸色目人)의 준말로서 몽골인, 한인, 남인을 제외한 서방계의 튀르크, 이란, 위구르, 탕구트, 킵차크, 아란, 유럽인 등을 가리킨다. 원은 중국을 지배하는 수단의 하나로 색목인에게 몽골인에 버금가는 준지배자로서의 특권을 주었고, 그들을 문무 각 방면에 등용했다. 

색목인들은 지리적으로 동서양의 무역 중심지인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면서 이(利)에 밝았다. 일찍부터 몽골족과 손을 잡고 국제 무역에서 큰 역할을 해왔다. 색목인들이 원에서 주로 재정을 맡았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또한 원은 한족의 영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색목인을 우대했을 뿐 아니라 세금을 징수하는 등 세리의 악역을 대신 맡김으로써 몽골인들에 대한 반발을 막는 효과를 노렸다. 

호구(戶口)를 살펴보면 한인은 200만 호(1,000만 명), 남인은 이보다 많은 1,200만 호(6,000만 명)에 이른 데 비해, 몽골인과 색목인 등 최상층은 40∼50만 호(200~300만 명)로 전체 인구의 3%밖에 되지 않았다.



몽골족은 빼앗은 한족의 땅을 모두 갈아 없어 몽골과 같은 초지로 만들어 몽골식 가축농업을 하려 했으나 거란족출신의 "야율초제"라는 휼륭한 재상이 몽골족은 저축에 관해 이해를 못하는 데 그러지 말고 이곳 한족들을 지금 그데로 먹고 살게 하고 이들로 부터 세금을 받으면 오래도록 편하게 이곳을 관리할 수 있다고 제한하여 몽골족은 그 방법을 체택키로 한였다.

야율초재/ 원나라 몽골의 휼륭한 재상

1190~1244

중국어 발음은 옐뤼 추차이(Yelü Chucai)耶律楚材


1. 
소개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5/57/%E8%80%B6%E5%BE%8B%E6%A5%9A%E6%9D%90.JPG/452px-%E8%80%B6%E5%BE%8B%E6%A5%9A%E6%9D%90.JPG?width=350
현대에 만들어진 흉상

원나라의 명재상. 자는 진경(晋卿)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며, 호는 담연거사(湛然居士). 별명으론 옥천노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야율씨, 즉 거란 황족 출신이다. 당시 거란족의 요나라는 이미 망했고 금나라가 중국 북부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곳이 칭기즈 칸에게 무참히 페망하고, 여행하던 중에 임관하게 되었다. 정복된 자들의 입장에선 가히 마왕이라 부를 만한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칭기즈 칸에게 늘 직언을 서슴치 않았다니 인물은 인물이었던 듯하다. 애초에 칭기즈 칸이 '나를 따르면 요의 원수를 확실히 갚아주겠소'라고 말했을 때 '제 조상이 다 금에서 벼슬을 했는데 이제 와서 무슨 원수랍시고 주군을 물어뜯겠습니까?'라고 꼿꼿하게 뻗댄 사람이니 알 만하지만



2. 최고의 재상

오고타이 칸 : 아버지께서 대제국을 남겨주셨고, 나는 그것을 개혁하려고 한다, 그대는 좋은 방법이 있는가?
야율초재 : 한 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한 가지의 해로운 일을 제거하는 것보다 못합니다. 새로운 제도로 백성을 번거롭게 하는 것보다는 기존의 불합리한 것을 제거하십시오.

이처럼 깐깐한 데가 있고 철저하여 자신에게도 엄격했다. 근거도 없는 모함을 받아 포박당해 
오고타이에게 끌려왔을 때 그게 당치도 않다는 걸 알고 있었던 칸이 그걸 풀어주려고 했으나, "무언가 이유가 있어서 잡혀왔을 것인데, 아무 해명도 없이 풀어주면 원칙이 바로 서지 않는다"며 고집스레 그대로 묶여 있었다. 어명보다 원칙이었던 것이다.

몽골 애들은 때려 부수고 획득하는데는 탁월하였지만 통치의 기술이 없었는데, 그런 점에서 야율초재가 세운 업적은 지대한 것이었다. 많은 업적이 있지만 특히 눈에 띄는 업적은 금나라 수도 변경 함락시, 그간의 몽골족 원정 원칙을 뒤집어 엎은 것.

호라즘 왕국의 건에서 알 수 있듯이 몽골은 원정 중에 저항한 적에 대해서 일체의 자비를 보이지 않았다.[4] 하지만 야율초재는 칸에게 모든 항복하지 않은 자를 죽여 없애는 제도를 고쳐야 한다고 간언하여 그걸 관철시켰다. 덕분에 몽골은 금나라의 문물과 군사기술을 성공적으로 흡수할 수 있었고, 이는 후의 남송 정벌 때 양양성 공방전 등에서 제대로 위력을 발휘했다. 물론 문화나 학술 발달에 도움이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 외에도 전체적으로 못 하는 학문이 없었으며 청렴결백하고 강직한 성격으로 죽었을 때 집에 가 보니 취미삼아 수집한 돌이랑 글, 책들 외에 금은보화 같은 것들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죽은 후 유목민에게 맞지않고 한족에게 맞는 정책을 핀 것이 문제로 그가 주장했던 개혁들은 거의 대부분 묻혔다. 어쨌든 이 사람이 임관하기 전에는 몽골은 세금도 안 거뒀다. 나중에 아득바득 조세제도를 확립하고, 자연스레 산더미처럼 들어오는 재물들을 보고 황제가 턱이 빠질 만큼 놀랐을 정도.

그리고 사실 그가『중국인을 구했다』고도 볼 수 있는 게, 몽골군의 계획 중에는 「중국을 정복하면 중국인들을 모두 죽이고 농경지를 유목지로 만들겠다」는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몽골 항목에서 발췌) 이걸 안 막았다면 지금 중국은…


3.반론

여기까지만 보면 몽골 제국의 공신 중의 공신, 중신 중의 중신으로 보이겠지만 실은 그다지 높은 위치도 중요시 받는 인물도 아니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우선 당시 몽골 제국에서 상업과 기록등에서 여러모로 우대받던 페르시아인들의 기록에서 야율초재의 존재는 찾아 볼 수 없다. 특히 야율초재가 속해있던 몽골 제국 서기국(書記局)의 칭카이는 페르시아, 중국, 심지어 로마 교황청 사절의 기록에서 조차 중요인물로 기록되어 있지만 야율초재는??? 그런 것 없다. 그가 진정으로 중요인물이었다면 납득할 수 없는 처사이다. 

게다가 인류를 구했다는 둥의 오버도 자뻑 성향 혹은 추켜세워주기 성향이 강하다. 야율초재가 그런 발언을 했다지만 실제로 기록에 무지했던 몽골인들이 한문 기록 및 번역에 야율초재를 등용시켰기에 자신이 담당했던 한문 기록에는 대단히 중요한 듯 남아있지만 역시 다른 기록에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으며, 그 이후에도 몽골 제국은 수 없이 많은 제노사이드급 학살을 일으켰다. 흔히들 몽골 제국 점령 이후 화북지방의 황폐화를 이야기 하는데, 그 황폐화된 화북지방이 야율초재의 인류구원 신화 전설의 기반지방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몽골 제국 재상[8] 야율초재의 폭풍간지라…글쎄???[9]

게다가 저 발언 이후 경제적으로 중요하던 페르시아 지방은 엄청난 학살을 당하며 무너지고 있었고, 중국이나 페르시아 지방에 비하면 떨어지더라도 나름 부유한 경제력을 지녔던 키예프는 대도시에서 시골이 되도록 학살당했다

그래서인지 일본의 스기야마 마사아키는 대놓고 "야율초재 개거품. 한문화권에서는 존나 잘난척하는데, 다른 사서에 기록되지 않는거 보면 그럴 만한 가치도 없던거임"이라고 비웃었는데, 너무한 게 아닌가 싶을지도 모르지만 중국측 사서에 야율초재 및 서기국에 대해 하급 사무직이라고 버젓이 기록이 남아있는것을 보면 그의 말이 틀렸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즉 자신의 상부층인 몽골인들은 기록문화에 관심이 없고, 다른 문화권인들은 말 그대로 언어가 다르다. 자신의 공적및 행적을 과대평가해 써도 제지당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런 기록을 읽어 볼 수 있는 같은 문화권인 중국사람들에 대한 자신에 대한 포장과 허세. 실제로 이것이 야율초재 전설의 실체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는게 현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위에서 기록된 꼬장꼬장하거나 대쪽같은 이미지도 자신이 관여해서 남길 수 있는 기록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을 고려하면 순진하게 믿는것은 위험하다. 일단 기록을 찬찬히 살펴보면 상당히 잘난 척하고 은근히 거만함이 묻어 나오는 걸 보면 만들어진 이미지와 실제 성격의 괴리 또한 상당히 클 가능성이 높다



4,트리비아

이곳에서 그의 저서 《담연거사집》(湛然居士集) 중국어원본  1~3권을 PDF 파일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5.대중매체에서의 등장


칭기즈 칸과 몽골 제국의 시기를 다룬 코에이의 게임인 원조비사 징기스칸 4에도 등장한다. 원조비사에서는 정치력 A, 전투력 E. 지도력 B, 매력 B로 전투력을 제외하고는 준수한 능력치로 나온다. 징기스칸 4에서는 정치 100·지모 93·전투 34에 모든 내정 특기를 소유한 최강의 정치가로 등장한다. 특히 몽골 장수들은 원정을 떠나 때려부수는 역할을 하는 전투광, 전투기계들만 득실득실 하기에(사준사구) 그의 존재는 빛이 된다. 그의 이미지는 뭔가 징기스칸의 제갈량

삼국지 12에도 등장. 근데 생김새가 사마랑과 똑같다


[1] 이전 판에 이게 거란어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사실이 아니다. 거란어는 현재 복원이 힘들 정도로 자료가 없어서 발음을 재구하기 어렵다.

[2] 말년에 옥천산(玉泉山. 북경 서북쪽의 산)에 기거해서 생긴 별명이다. 도교에 일가견이 있었다.

[3] 몽골어로 '수염 긴 남자'. 그의 외모에서 따서 칭기즈 칸이 붙여준 이름이다. 칭기즈 칸은 항상 야율초재를 이 이름으로 불렀다.

[4] 두 발로 걷는 것들은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다고. 물론 호라즘은 지들이 자초한 바가 크지만.

[5] 이때 이후 몽골인들은 세금에 환장해서(대제국을 운영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중동 지방과 중앙 아시아에서는 세금을 엄청나게 매겨서 현지인들이 고통받았다고 한다. 이외에도 무역로를 장악해서 실리를 챙기려 했다.

[6] 겁스 무한세계에 이 계획이 현실화된 세계가 있다. 2004년에 TL3 즉 조선 전기 정도 기술 수준.

[7] 그런데 그렇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북중국 인구는 절반 이상이 사라졌다. 금나라 전성기에 3천만을 바라보던 화북 일대의 인구는 명 왕조 건국시에는 1200만 내외(…)였고, 강남 지역은 북부에 비하면 거의 인구를 온존하였지만 그래도 여기도 6천만을 바라보던 인구가 5천만 선으로 내려앉았다. …얼마를 갈아댄건지 원.

[8] 이 재상이라는 것도 어폐가 있는게, 몽골 제국에는 흔히 우리가 떠올리는 재상의 존재가 없었다. 일단 야율초재가 활동하던 시기 야율초재의 활동반경은 화북지방뿐이고 그것도 혼자 한게 아니라 여러민족의 인사들과 함께 했다. 그렇지만 몽골제국이 그런 인사들을 사용하는 모양새를 페르시아, 중국 등이 지금까지 해왔던 식으로 그냥 바지르, 재상이라고 기록한 것일 뿐. 일단 재상이 수십명인 것부터 에러, 근데 그 중에서도 타 민족에게 돋보이지 않았던 야율초재가 폭풍간지 명재상???

[9] 다만 이 부분도 야율 초재가 한 일이 공식적으로 권력을 휘두른다기 보다, 겉으로는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간간히 칸과 주요인사들에게 조언하는 정도였다고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몽골 출신 인물들이 득시글한 상황에서 저렇게 처신하지 않았다면, 목숨부지도 힘들었을 수 있다. 또한, 페르시아나 현재 미국 등 백인 문화권에서는 실제로 으스대면서 직접적으로 파워를 과시하지 않으면, 그 사람들이 실제 실력자인지 잘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자 문화권에서는 실제 권력이 있더라도 겸손한 척 처신하는 것이 중요한 덕목의 하나이다. 이 점이 문화권에 따른 기록의 차이에 반영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몽골인은 한자를 몰랐을 수 있지만, 한족, 금나라 출신, 고려인 등 한자를 이해하고 이를 몽골 권력자에게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많기도 했고.

[10] 다만, 이 부분은 야율초재가 할 수 있었던 것이, 항복안한 자를 싸그리 죽여 없애던 몽골의 기존 관습에서 쓸모 있는 자들은 살려서 쓰자 정도로 순화시키는 정도였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많은 다수가 학살당하는 걸 막을 순 없었지만, 적어도 공돌이(…), 기타 재주 있는 자들은 살려서 인류의 기술과 문화수준이 리셋되는 것은 막았다고 볼 수 있다.





몽골이 중국땅을 장악하고 있던 
약 97년간 동안 국고를 한족들로 부터 세금을 통해 충당 해 왔다.
모든 국가의 제정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팽창하게 되어 있는데, 결국 몽골 원나라 역시 지배층의
사치풍조와 대외원조,그리고 내부의 정쟁요인을 통하여 만성적 적자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것을 만회하기 위하여는 강남지역의 한족과 농민들에게 무절제한 세금의 증액과 거침없는 
수탈 행위가 증폭 될 수 밖에 없었다. 14세기 중반에 접어 들면서 강남인과 농민의 인내가 한계를
맞이 하면서 중국 각지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대규모의 군중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당시에도 중국은 땅이 넓고 인구가 많은 땅이기 때문에 이러한 성격의 반란에 동원되는 인원의
스케일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 할만큼 많았다. 상황을 수습하기 위하여 충원되는 군사들의 규모 역시
만만치 안았을 것이다. 결국은 성난 민족적 반란이 일어나고, 이를 주도한 한족의 장수  "주원장"을
통하여 반란에 성공하고 그는 명나라를 권국하기에 이른다.


주변국가의 정란속에 쉽게 영향을 받는 한반도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발달된 민주주위 사회에서도 평화롭게 민주적인 선거를 통하여 정권이 교체되도 정적에 대한 보복이 있어서 국가가 혼란에 빠지는 현실을 체험하고 있는 현실에서 당시 중국인들이 받았을 고통과 공포와 불 평등이 얼마나 심했을지 감히 짐작 하고도 남을 것이다.

몽골이 중국에 들어와 처음 한것이 수많은 다른 인종을 행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인종을 먼저  분류 하는 일이었다. 그것이 바로 앞에서 밣힌 데로 
몽골인,색목인(피부나 눈빛이 다른인종),
화복인(한인), 남송인(남인), 이 그것이다.
물론 이들 인종별 
직업이나 혜택 역시 모두 다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 여기서 이글의 중심내용이 되는 남인들의 이동경로를 주위 깊게 살펴 보아야 한다.
남인의 속한 여러 지파가 있었고 그중에 "관선생"이라는 장수가 이끄는 우리에 귀에 익은 홍건족이 있었다.머리에 불은 띠를 두루고 있어서 부쳐진 이름이라고 한다. 몽골족의 흉악한 소문과 두려움이 밀려 오는것을 직감하는 이들은 지금의 만주땅으로 몽골족의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하여 터전을 북동 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다가 조금씩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 탐색을 하다가 결국 
1359년(공민왕 8) 음력 12월, 모거경(毛居敬)이 이끄는 4만여 명의 홍건적이 얼어 붙은 압록강을 건너 의(義)·정(靜)·인(麟)·철(鐵)의 4주(州)를 함락시키고, 이어 서경을 점령하였다. 이것이 우리가 잘 아는 홍건적의 난이다. 


   


홍건적 / 紅巾賊/에 관하여


중국 원나라 말기 하북성 일대에서 일어난 한족 반란군의 하나로 백련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봉기하였다. 본래 홍건군이라고 하지만 고려에서는 이들로 인해 피해를 많이 봤던 탓에 홍건적, 홍두적, 홍적등 도적으로 부른다. 홍건이란 것은 황건적처럼 머리에 붉은 수건을 붙이고 다닌 것에서 유래했다. 
결국 원나라는 무너지고, 홍건적 출신의 주원장이 명나라을 세웠으니 중국 역사에서 몇 안되는 성공한 반란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원나라 말기에 봉기한 세력은 장사성, 방국진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홍건적 계열의 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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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건적의 고려 침입/
 위키백과에서  발취


홍건의 난(紅巾之亂) 또는 홍건적의 난(紅巾賊之亂)은  말기에 한산동(韓山童)을 수장으로 뭉친 백련교도가 중심이 되어 봉기한 한족의 농민 반란군으로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둘렀기 때문에 홍건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홍건적은 홍적(紅賊)·홍두적(紅豆賊) 등으로도 불렸다.


개설
1348년 원나라에서는 절강의 방국진이 해상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차례로 반란이 일어나, 1351년에는 가노에 의해 황하의 개수 공사를 시키던 백련교도인 홍건당이 봉기했다. 그때 한산동은 미륵불(彌勒佛)이라 자칭하며 민심을 선동하였다.
그 뒤 한산동은 관군에게 붙잡혔으나 그의 부하 유복통은 군사를 일으켜 각지를 노략질하였는데, 그 군대는 10만에 달하였다. 그리고 한산동의 아들 한림아를 맞아들여 황제로 삼고 국호를 송(宋)이라 하였다.
1354년 대규모 토벌군을 이끈 토구다가 그가 강대한 군사력을 가지는 것을 두려워한 토곤 테무르에게 경질되어 살해당하자, 이것을 칸의 권력 회복과 맞바꾸어 군벌에게 의지하던 원나라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시키게 되었다.

1357년 홍건적은 유복통의 인솔 아래 3개 군으로 나뉘어 대북벌을 개시하여 초반에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원나라군의 반격과 내부 갈등으로 북벌이 좌절되면서, 홍건적 일부 세력들은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 행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관선생과 파두반의 홍건적이 원나라 여름 수도였던 상도(上都)와 주변 지역을 함락시키기도 했으나 1359년 주력 부대가 주둔하던 변량(개봉)을 다시 원나라에 뺐기면서 요동으로 이동하게 되고, 급기야 원군(元軍)에게 쫓겨 고려 영토로 들어오게 되었다.

주원장이 저우장의 심만삼의 재력에 도움을 받아, 서수휘, 
진우량장사성 등의 세력을 격파했다한다. 주원장은 남경을 근거지로 하여 기타 반란자들을 차례로 쓰러뜨리고 장강유역의 화남을 통일하는 데 성공하여 1368년 난징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명나라를 건국하고 연호를 홍무라 정하니 홍무제이다. 홍무제는 건국하자마자 북벌을 개시하여 원 순제(토곤 티무르)는 대도(북경)를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쳐 만리장성 이남의 중국은 명나라로 통일되었다. 결국 중원을 점령하고 있던 원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명(明)을 건국하여, 한족(漢族) 왕조를 복원시켰다.

홍건족의 고려 침공

홍건적들은 두 차례에 걸쳐 
고려에까지 침범하였다.
1359년(공민왕 8) 음력 12월, 모거경(毛居敬)이 이끄는 4만여 명의 홍건적이 얼어 붙은 압록강을 건너 의(義)·정(靜)·인(麟)·철(鐵)의 4주(州)를 함락시키고, 이어 서경을 점령하였다. 1360년 음력 1월 하순, 고려군은 2만명의 병력으로 서경 탈환을 시도했다. 비록 고려군 사상자가 1천여 명에 달했지만, 홍건적은 수천 명이 전사하면서 서경을 버리고 북쪽의 용강과 함종 방면으로 퇴각했다. 그 뒤 다시 추격을 당하여 압록강을 건너 도망한 적은 3백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한다.

그 뒤에는 수군으로써 황해·평안도의 해안지대를 산발적으로 노략질하다가, 
1361년(공민왕 10) 음력 10월, 원나라의 대대적인 공세에 밀린 홍건적은 하북 지방으로 퇴로가 차단되자 다시 고려를 침공했다. 2차 침공의 주역은 반성(潘誠), 사류(沙劉), 관선생(關先生), 주원수(朱元帥) 파두반(破頭潘) 등이며, 병력은 20만 명이었다. 이때 홍건당에서 주원장이 두각을 나타냈다. 홍건적은 음력 11월 11일에 절령(岊嶺 : 자비령)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하고 수도 개경(開京)에 육박하여 왔다. 이에 공민왕 및 왕실과 정신(廷臣)은 남쪽인 복주(현재의 경상북도 안동)로 대피하게 된다. 왕가(王駕)가 이천에 도착하던 날 홍건당은 개경을 함락하고 온갖 만행을 다하였다. 그러나 홍건당은 개경 입성 후 2달간 주둔하면서 더 이상 남진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홍건적이 개경에서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 중에 고려는 전국적으로 20여만의 병력을 모병했다. 복주에 있던 공민왕은 그해 음력 12월경에 정세운을 총병관(총사령관)으로 삼았고, 정세운은 
1362년 음력 1월, 동교 천수사(경기도 파주시 장단면 소재)에서 안우, 이방실, 이여경, 최영, 이성계, 김득배(金得培) 등에게 20만의 병력으로 개경을 포위하도록 했다.

전의가 꺾인 홍건적은 이 두 갈래 길로 개경에서 도망쳐 그대로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후퇴했다. 고려군은 그들의 퇴로를 열어준 채 계속 추격하여 홍건적을 끊임없이 괴롭혔으며, 여름에 수장인 파두반을 사로잡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공민왕과 고려 조정이 개경을 떠난 이후 음력 11월 24일에 개경에 입성했다.

이성계는 휘하의 고려인 및 여진족으로 구성된 친병 조직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다. 그는 선봉에서 적장들에게 직접 공격을 가하여, 마침내 홍건적의 괴수 사유(沙劉)와 관선생(關先生)을 죽이고, 수도에 제일 먼저 탈환해 입성하는 큰 전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냈다.

이로써 2차에 걸친 홍건적의 난은 끝나게 되었는데, 앞서 중국의 북서에서 만주 방면으로 진출한 홍건적의 무리들은 고려에서 전멸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난은 고려에도 막대한 타격을 주어 국운을 쇠퇴케 하여 고려 왕조의 멸망을 재촉하는 원인의 하나가 되기도 하였다.